사랑*그리움♤

[좋은시]나를 만나는 날 .. 도종환

행福이 2007. 11. 20. 11:43

 나를 만나는 날 - 도종환


비 그치자 뜨락에 채송화 노랗게 피었습니다.
비 그치자 고추잠자리들 몰려나와

날개를 반짝이며 날아다닙니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만남으로

보낸 하루는 가슴 뿌듯합니다.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사람이든

모임에서 새로 만나 알게 된 사람이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즐거운 일입니다.

수첩에 빼곡하게 적힌 일정표 속에는
반드시 사람을 만나는 일이 들어 있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유익하게

시간을 보낸 날은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러면 내 안의 하느님도 빙그레 웃으십니다.

그런데 일정표가 비어 있는 날이 있습니다.
수첩의 네모 칸 안에 며칠씩 만나야 할 사람과

해야 할 일이 적혀 있다가
아무 것도 쓰여 있지 않은 날이 있습니다.

그런 날은 나를 만나는 날입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날 그를 위해
신경을 썼던 것처럼 나를 만나는 날은

나를 위해 시간을 보냅니다.

오랜만에 나를 위해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시도 읽어주고 새로 나온 책도 권합니다.

무엇보다 맑은 바람을 오래오래 만나게 해줍니다.
산벚나무처럼 혼자 고요 속에 가만히 있게 해주거나,
편안하게 누워 계곡물 흐르는 소리를 듣게 해줍니다.
그러다 잠이 오면 한두 시간 낮잠을 자게도 해줍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는 동안 몸은 가벼워지고 마음도 청안해집니다.
몸에는 풀냄새 나뭇잎냄새가 배고
마음에는 바람소리가 들어와 자리를 잡습니다.

눈은 초록빛 물이 들고 귀에는 새소리 풀벨레소리가 쌓여 있습니다.
그런 냄새, 그런 소리들이 제게는 큰 재산입니다.

내가 베고 누웠던 구름, 내 귀를 씻은 물소리는
내 안에 들어와 여전히 제 빛깔 제 소리로 살아 있는 걸 느낍니다.

이런 날 내 영혼에도 날개가 있다면 잠자리처럼 맑고 투명해져
푸른 하늘 위를 떠다닐 것 같습니다.

아니 나 대신 내 안의 하느님이 더 기뻐하시며 잠자리들을 바라보십니다.
충만한 얼굴로 옥빛 하늘을 바라보십니다.
나는 텅 비어 있는 날이 좋습니다.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정을 조정해서 하루를 비워둡니다.

내가 나를 만나는 일도 중요한 일정입니다.
나를 만나기로 한 날 다른 이들이 약속을 잡자고 하면
나는 중요한 약속이 이미 잡혀 있다고 말합니다.

나를 위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중요한 일정이고,
바꿀 수 없는 약속이어야 합니다.

내 안에도 내가 돌보고 배려해야 할 영혼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