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내고장△

마포 지명의 변화들..

행福이 2008. 10. 6. 17:23

 

 

마포 지명의 변화들..

 

면적은 23.87㎢, 인구는 38만 2195명(2002)이다.

1944년 서대문구에서 분구·신설되었다.

관할구역은 아현(阿峴)1∼3동, 공덕(孔德)1∼2동,

신공덕동(新孔德洞), 도화(桃花)1∼2동,

용강동(龍江洞), 대흥동(大興洞), 염리동(鹽里洞), 노고산동(老姑山洞),

신수동(新水洞),

창전동(倉前洞), 상수동(上水洞), 서교동(西橋洞), 동교동(東橋洞),

합정동(合井洞),

망원(望遠)1∼2동, 연남동(延南洞), 성산(城山)1∼2동,

상암동(上岩洞) 등 24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의 안산(鞍山)에서 뻗어내려온 낮은 구릉들과

한강의 충적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강변에는 마포대교·양화대교·성산대교가 놓여 있으며,

신촌로터리에서 이어지는 서강대교가 있다.

지하철 2호선이 당산철교를 지나 남북으로 지나며,

지하철 6호선이 구의 중심을 동서로 관통한다.

마포는 예로부터 한강의 대표적인 나루터로,

경기의 농산물과 황해의 수산물 집산지로서도

유명하였으나 하운(河運)의 쇠퇴와 함께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마포를 중심으로 하는 동부지역은 일찍이 시가지화되었으며,

아현동 일대는 전통적 주택지대를 형성하였다.

반면 서부지역은 신개발지로 진행 중이며

망원동·성산동 일대는 상습 침수지구였으나 강변4로(江邊四路)가

개통된 후로는 대규모의 주택단지로 탈바꿈하였다.

종합대학으로 신수동에 서강대학교,

상수동에 홍익대학교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정명경집해관중소(보물 736), 월인석보(보물 745),

양화나루·잠두봉유적(사적 399), 망원정지(서울기념물 9),

용강동 정구중가(서울민속자료 17)가 있고, 그밖에 유적으로는

서울 용강동 이회성가(家), 대흥동 동제당,

아소정지, 현석동 대동당, 당인동 부군당 등이 있다.
〈서울 용강동 정구중가〉 1920년대에 지은 口 자형 집으로

안채 뒤에 별채가 있다.

동쪽으로 배치된 건평 71평의 이 집은 도시의 제약된 대지에 별채까지 두어

주택의 깊은 맛을 보여주고 있다.

 

[1]아현동

면적 0.79㎢, 인구 3만 6519명(2001)이다.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속한 동이다.

동쪽의 서대문구 만리동, 서쪽의 염리동, 남쪽의 공덕동,

북쪽의 북아현동과 접한다. 동 이름은 아현(阿峴)

혹은 아이고개·애고개라고 부르던 고개에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서부 반송방 아현계(阿峴契)·
차자리계(車子里契)·권정승계(權政丞契)였다.

1913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아현리로 되었고,

1936년 경성부 아현정(阿峴町)으로 바뀌었다.

1943년 서대문구로 편입되었고, 1944년 마포구에 속한 뒤

1946년 아현동으로 바뀌었다.

법정동인 이 동은 행정동인 아현1~3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북쪽으로 신촌로, 동쪽으로 마포로가 지나고, 지하철 2호선 아현역이 있다.

마포로변에는 마포경찰서, 시립마포도서관이 있고, 종교기관으로는

서부교회, 아현교회, 한국성결교회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그리스정교회가 있다.

애고개 혹은 아현은 서소문(西小門) 밖에 있었는데,

사람이 죽으면 서소문을 통해 시신을 성 밖에 버렸으므로

서소문을 시구문(屍口門) 또는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다.

매장지로는 만리재, 애고개, 와우산 등이 이용되었는데,

애고개는 특히 아이들 시체를 많이 묻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아이들 무덤이 많아서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애오개탈춤놀이다. 애고개탈춤놀이라고도 하는데,

아이들이 주요 등장인물이며, 지금은 경기도 고양시에서 전승되고 있다.

별부동은 염리동 쪽에 있던 마을인데, 거북이가 헤엄치는 형태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늑교는 굴레방다리를 한자로 표시한 것으로,

마포나루와 서교리 방향으로 가는 길에 바퀴살처럼

다리를 놓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수맥이 북악에서 아현을 지나 복개된 창천 쪽으로 지나기 때문에 우물이 많았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활인서가 있었는데 고려시대 동서대비원 제도를 이어받은 것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기능을 강화하였다.

매년 정월 보름이면 석전(石戰) 놀이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삼문 밖 사람들과 아현 사람들이 무리지어 돌이나 몽둥이를 들고 싸우는 놀이로, 삼문 밖 사람들이 이기면 서울 부근에 풍년이 들고 아현 사람들이 이기면 8도에 풍년이 든다 하여 삼문 밖 사람들도 아현 편을 들어 아현 편이 이기도록 하였다고 한다.

 

[2]공덕동

면적 0.73㎢, 인구 2만 3888명(2001)이다.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속한 동이다.

동쪽의 용산구 효창동, 서쪽의 염리동, 남쪽의 신공덕동·도화동,

북쪽의 아현동과 접해 있다. 이곳의 옛 지명이 공덕리(孔德里)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서부 용산방 청파4계(靑坡四契)·공덕리계(孔德里契)·

만리창계(萬里倉契) 지역이었다. 1913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龍江面)

공덕리로 되었고, 1936년 경성부 공덕정(孔德町)으로 편입되었다.

1943년 서대문구 공덕정이 되었고, 1944년 마포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 공덕동으로 바뀌었다. 법정동인 공덕동은

행정동인 공덕1·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포로변에 있으며 가장 먼저 사무실과 주거용 혼합건물인 오피스텔이

등장한 곳이다. 마포로변의 불량주택 재개발사업 결과

업무·판매·근린생활시설을 합친 복합기능으로 설계되었다.

공공기관으로는 지방행정회관,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

사회복지회관 등이 있다.

자연마을인 분장동은 조선 말기 밭이었던 이곳에

도성 안의 분뇨를 퇴비로 사용해서 채소를 재배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분뇨처리장 역할을 하여 똥통길이라는 이름도 생겼으며,

1920년대 초 이 일대를 정비하여 화장터로 사용하였다.

한정동은 큰 우물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동네 사람들이 다 마실 만큼 수량이

풍부하였고 가뭄에도 수위의 변화가 없었다 한다.

칠목동은 옻나무 자생군락지에서 비롯된 이름이며

지금은 사라진 황칠(黃漆)의 재료로 쓰였다.

만리재는 만리창(萬里倉)이 있었으므로 유래된 동 이름이면서 고개 이름인데,

대현(大峴) 혹은 큰고개라고도 한다.

아현(애고개)에 대응한 것으로,

고개가 길고 높아서 만리나 된다고 하여 붙여졌다.

지금의 동도고등학교 자리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은둔했던 아소정(我笑亭)이 있었다.

 

[3]신공덕동

면적 0.26㎢, 인구 1만 570명(2001)이다.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속한 동이다.

동쪽의 용산구 효창동, 서쪽과 북쪽의 공덕동, 남쪽의 도화동과 접한다.

이곳의 옛 지명이 신공덕리(新孔德里)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서부 용산방 성외(城外) 신창계(新倉契)였다.

1913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龍江面) 신공덕리(新孔德里)였고,

1936년 경성부 신공덕정(新孔德町)으로 편입되었다.

1943년 서대문구 신공덕정으로 바뀌었고, 1944년 마포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 신공덕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법정동과 행정동의 이름이 같다.
자연마을로는 말등테·신촌·호박밭·홍예동·감나무밭·복사나무동산 등이 있었다.

이 일대는 조선 말기까지도 과일이나 채소를 재배하던

야산지대로서 사람이 살지 않았다.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을미사변(1895)이 일어날 무렵으로,

새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하여 신촌 혹은 새말로 불렸다.

홍예동은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와

그의 생모인 선빈성씨(宣嬪成氏)의 묘소인

효창원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마을 이름이다.

지금은 효창공원이 된 효창원의 봉분을 멀리서 보면,

마치 홍예(紅霓:무지개)를 쌓아올린 것처럼 보여 홍예분(紅霓墳)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백범로로 편입된 92번지 일대에는 홍문(紅門)이 서 있다고 하여

홍문집터라고 하였다. 홍문은 효부·효자·열녀 등을 위해 세우고

후세 사람들에게 본받으라는 뜻에서 세우는 것이지만,

이곳의 홍문은 효성과 관련해 세운 것이 아니라,

효창원에 있는 홍살문을 뜻하는 것이다.

 

[4]도화동

면적 0.58㎢, 인구 2만 3650명(2001)이다.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속한 동이다.

 동쪽은 용산구 도원동, 서쪽은 마포동·용강동·대흥동, 남쪽은

용산구 청암동, 북쪽은 공덕동·신공덕동·염리동과 접해 있다.

복숭아꽃이 많이 피어 복사골로 불렸으며,

조선시대부터 도화내동(桃花內洞)이라 부른 데서 동 이름이 유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서부 용산방 마포계(麻浦契)·도화동계(桃花洞契)였다.

1911년 경성부 용산면에 속하였고, 1914년에는 도화정(桃花町)이라고 하였다. 1943년 용산구에 편입되었고, 1944년 마포구로 관할이 바뀌었으며,

1946년 도화동으로 되었다.

법정동인 이 동은 행정동인 도화1·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불량지구재개발사업으로 새롭게 변하였고, 많은 은행과 오피스텔이 들어서 있다. 복사골이라고 하던 곳은 지금의 삼성아파트와 우성아파트 일대를 말한다. 경원선이 가설될 무렵만 해도 이 지역은 복숭아밭이었으나 점차 주거지로 바뀌면서 지금은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지대가 높아서 크고 작은 고개가 많이 있었는데, 용산 새창으로 넘어가는 새창고개와 용산에서 마포로 넘어가는 용산고개가 있었다.

새창고개는 사창고개라고도 하는데, 용산에 별영창이 있었으므로 지명이 유래하였고, 용신고개는 삼개고개라고도 하며, 마포(麻浦)를 한글로 삼개라고 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1925년 대홍수 때 이촌동에서 살던 사람들이 이주하여 공동으로 파서 사용하던 대동우물터는 지금은 기념표석만 남아 있다.

 

[5]용강동

면적 0.66㎢, 인구 1만 710명(2001)이다.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속한 동이다. 한강변에 있으며 동쪽의 도화동, 서쪽의 현석동·신수동, 남쪽의 마포동, 북쪽의 대흥동과 접한다. 동 이름은 이곳의 한강이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이라는 풍수지리설에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서부 용산방 옹리상계(甕里上契)·옹리하계(甕里下契) 지역이었다. 1911년 경성부 용산면(龍山面)에 속하였고,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龍江面) 동막리(東幕里)로 바뀌었다. 1936년 용강정(龍江町)이 되었고, 1943년 용산구에 편입되었다. 1944년 마포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 용강동으로 바뀌었다.

행정동인 이 동은 법정동인 용강동·토정동(土亭洞)·

마포동(麻浦洞)으로 이루어져 있다.

토정동은 조선시대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土亭) 이지함이 흙으로 정자를 짓고 거주했던 데서 유래한다. 마포동은 '삼개'라는 우리말 포구 이름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토정길이 용강동을 동서로 지나고,

한강변에는 대건로, 동쪽으로는 마포로가 지난다.

토정길 북쪽보다 남쪽이 구획정리가 잘 되어 있다. 마포부녀복지관, 마포청년회의소가 있고, 마포대교 북단에는 600여 대를 주차할 수 있는 마포주차장이 있다. 토정길 주변은 마포주물럭갈비가 처음 시작된 곳이다. 전차를 이용한 승객들이 종점인 이곳에서 많이 찾던 주점의 안주로 개발한 것인데, 현재는 마포 명물이 되었다.

동을 이룬 동막리는 옹기를 만들던 곳이 많았기 때문에 옹리라 하던 것을, 동이를 만드는 곳이라는 뜻의 동막(東幕)으로 바꾼 것이다. 335번지에는 용강동 정구중가(서울민속자료 17)가 있다. 대지 241평에 건평 71평으로 1920년대에 지어졌다.

 

[6]대흥동

면적 0.54㎢, 인구 1만 6451명(2001)이다.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속한 동이다. 동쪽의 염리동, 서쪽의 신수동·노고산동, 남쪽의 용강동, 북쪽의 서대문구 대현동과 접해 있다. 동 이름은 1936년 서울의 행정구역을 확장할 때 일본인들이 동막하리(東幕下里)를 대흥정(大興町)이라고 바꾸어 편입하면서부터 불리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서부 용산방 옹리하계(甕里下契) 지역이었다. 1911년 경성부 용산면에 속하였고,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동막하리(東幕下里)에 속하였다. 1936년에는 대흥정(大興町)이라고 하였고, 1943년 용산구에 편입되었다. 1944년 마포구로 관할이 이전되었으며, 1946년 대흥동으로 바뀌었다.

법정동과 행정동의 이름이 같다.

동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29년 용산에서 당인리를 왕복하는 용산선을 개설하면서부터이다. 그 이전에는 옹기를 만드는 작은 마을이었으나 당인리 화력발전소에 소요되는 각종 물자를 운반하는 철도의 중간 기착점인 동막역이 건설되면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동막역 부근의 우물을 새우물이라 하였는데, 화차의 냉각수로 사용하기 위해 우물을 팠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이 우물이 있는 동네를 새우물거리라 하였다.

불당재는 최영 장군을 모신 당집이 있는 동산 근처인데, 416번지에 있는 동제당을 불당재라고도 한다. 17세기 경 동막하리에 화재가 자주 발생하자 어느 도사가 덕물산의 최영 장군(무속에서는 최일 장군이라고도 함) 제당을 이전하면 화재를 예방할 수 있다고 하여 당을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불이 나지 말라는 뜻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건립된 것인데, '불이 안 나는 당'이라는 뜻을 지닌 불당이 되었다. 불당이 있는 부근의 고개를 불당재라고 하였고,

이로 인해 동네 이름까지 불당재라고 하였다.

노고산의 표토가 진흙에 가까운 붉은 색을 띠므로 대흥동길이 나 있는 숭문고등학교 근방을 차돌배기 혹은 붉은 언덕이라 하였다. 비가 오면 질척거려 차돌을 깔아 이를 방지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7]염리동

면적 0.53㎢, 인구 2만 393명(2001)이다.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속한 동이다. 동쪽의 아현동과 공덕동, 서쪽의 대흥동, 남쪽의 도화동과 용강동, 북쪽의 서대문구 대현동과 접한다. 이 일대에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아서 얻은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서부 용산방 공덕리계(孔德里契) 지역이었다. 1911년 경성부 용산면(龍山面) 염동(鹽洞)이었고,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龍江面) 염리(鹽里)로 바뀌었다. 1936년 염리정(鹽里町)으로 되었고, 1943년 용산구에 편입되었다. 1944년 마포구로 관할이 바뀌었으며, 1946년 염리동으로 되었다.

법정동과 행정동의 이름이 같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옛날 동막역 부근에 소금창고가 있어 소금장수들이 많이 살았으며, 마포동의 소금머리골에는 소금배가 드나들던 소금전이 있었다. 골목이 많고 경사진 주거지역이 많다. 서강로가 지나며 서강로 남쪽 지역은 구획정리가 잘 되어 있다. 의료보험관리공단과 한국통신전산소가 있다.

자연마을로 느티나무배기, 쌍룡대, 개바위, 마루보시사택, 고추밭머리 등이 있다. 쌍룡대(雙龍坮)는 개바위 주변에 있던 마을인데, 용 두 마리가 하늘로 올라간 후 그 자리에 빈터가 생겼으므로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78번지에 있던 마루보시 사택은 1936년 동이 서울로 편입될 때 일본인 마루보시의 목장이 있던 지역으로 이곳 소속 목동들과 관리인을 위해 지어졌다. 150번지에는 아소정(我笑亭)이 있었다. 흥선대원군의 공덕리별장으로, 아흔아홉 칸이며 1893년부터 거주하였다. 1902년 그가 죽자 아소정 안에 그의 묘소를 만들었으므로 이 일대를 한때 국태공원(國太公園)이라고도 하였다. 

 

[8]노고산동

면적 0.48㎢, 인구 9,771명(2001)이다.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속한 동이다. 노고산 기슭에 있으며, 동쪽의 대흥동, 남쪽의 신수동, 서쪽의 서교동·창전동, 북쪽의 서대문구 창천동·대현동과 접해 있다. 동 이름은 노고산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연희방 아현계(阿峴契) 지역이었다. 1911년 경성부 연희면 노고산리(老姑山里)·세석리(細石里)로 되었고,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노고산리에 속하였다. 1936년 노고산정(老姑山町), 1943년에는 서대문구 노고산정이라 하였다. 1946년 노고산동으로 바뀌었고, 1964년 마포구로 관할이 바뀌었다. 법정동명과 행정동명이 같다.
 
산자락에 있어 분고개, 갓방고개, 문지울 등 산에 관한 이름이 많다. 마포구 일대에서는 비교적 복잡하고 번화한 지역이며, 신촌 로터리를 중심으로 신촌로, 봉원로, 서강로 등이 지나고, 백화점과 신촌상가가 형성되어 있다. 봉원로에는 강화도행 버스 정류장이 있다.

자연마을 세석리는 잔돌배기 또는 주막거리라고도 하였는데, 주막거리는 큰길 가에 있어 주막이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서대문 쪽에서 아현고개를 넘어오면 갑자기 자갈이 많은 곳으로 변해 자잘한 돌이 많다 하여 세석리 또는 잔돌배기라 하였다.

마포에는 예전부터 부자들이 많이 살았다. 황부자, 오부자 등은 대표적인 부호였는데, 지금도 일부 후손들이 신촌로터리 부근에 살고 있다. 개발되기 전에는 전답으로 형성되어 있던 지역으로 신촌에서 마포나루로 가는 길에 황부자 땅을 밟지 않으면 지날 수 없을 정도였다. 1963년 이후 경인택지개발사업으로 상가와 주택지역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9]신수동

면적 0.67㎢, 인구 2만 333명(2001)이다.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속한 동이다. 동쪽의 대흥동·용강동, 서쪽의 구수동·창전동, 남쪽의 현석동·신정동, 북쪽의 노고산동과 접한다. 옛 이름은 신수철리(新水鐵里)인데 새로 된 수철리라는 뜻이며, 수철(水鐵)은 무쇠를 뜻한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서부 서강방 신수철리계(新水鐵里契) 지역이었다. 1911년 경성부 서강면 신수철리로 바뀌었고,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신수철리에 속하였다. 1936년 신수정(新水町)으로 바뀌었고, 1943년에는 서대문구 신수정에 속하였다. 1944년 마포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 신수동으로 바뀌었다.

행정동인 이 동은 신수동·구수동(舊水洞)·현석동(玄石洞)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수동은 신수동과 구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며, 현석동은 마을 부근의 돌이 검다고 하여 얻은 이름이다.
 
110번지 일대를 무쇠막이라고 하는데, 무쇠솥이나 농기구를 만들어 팔거나 국가에 바치는 공장이 많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109번지에 있던 바탕거리는 기구를 만드는 주물틀을 우리말로 바탕이라 하므로, 솥을 만들기 위해 걸었던 바탕이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109-2번지에는 무쇠막에서 벌겋게 단 무쇠를 식히는 데 사용하던 바탕우물이 있었다. 501번지 메주무수막은 궁중이나 관아에서 쓰는 메주를 만들어서 바치던 곳으로, 메주가마라고도 불렸다.

91번지의 달맞이 동산은 남산에 달이 뜨는 것을 제일 먼저 볼 수 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교육기관과 공공기관에는 서강대학교, 광성고교, 마포세무서, 출판협동조합 등이 있다.

 

[10]창전동

면적 0.47㎢, 인구 1만 2527명(2001)이다.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속한 동이다.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산세가 형성된 와우산이 있어 비교적 지대가 높은 곳이다. 와우산은 소가 누워 있는 모습과 흡사하여 얻은 이름이다. 와우산 동쪽 기슭에 조선시대 공미 저장 창고였던 광흥창(廣興倉)이 있었는데, 이 창고의 앞마을이라는 뜻에서 창전이란 이름을 얻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서부 서강방 창전리계(倉前里契) 지역이었다. 1911년 경성부 서강면 창전리에 속하였고,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 창전리로 바뀌었다. 1936년 창전정(倉前町)이 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에 편입되었다. 1944년 마포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 창전동으로 바뀌었다.

법정동과 행정동의 이름이 같다.
 
1970년 4월 와우산 동쪽 기슭에 있던 시민아파트 제15동 건물이 붕괴하여 33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부실공사가 원인이었다. 와우산은 소가 누워 있는 형상으로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를 두고 소의 엉덩이 부분에 아파트를 지었으므로 이 부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소가 흔드는 바람에 사고가 일어났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동 이름의 유래가 된 광흥창은 경기도와 삼남지방에서 바친 공미를 쌓아 두었다가 관리들의 녹봉을 관장한 관아인데, 고려시대의 제도를 본받아 지은 것이다.

산2번지에는 공민왕 신당(恭愍王神堂)이 있다. 신당에는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 최영장군 등의 화상이 있고, 신당 주위에는 서울특별시 지정보호수인 느티나무와 주민들이 한때 식수로 사용하였던 신당우물이 있다. 유적지로는 사정(射亭)이었던 팔관정(八觀亭)과 와우산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 정자 탁영정(濯纓亭) 터가 있었다고 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11]상수동

면적 1.10㎢, 인구 1만 4705명(2001)이다.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속한 동이다. 와우산 서쪽 기슭에 있으며, 남쪽으로 한강이 흐른다. 북쪽과 동쪽은 창전동, 서쪽은 서교동과 접한다. 한강 주변의 마을 중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동 이름이 유래한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서부 서강방 상수일리계(上水溢里契)·하수일리계(下水溢里契) 지역이었다. 1911년 경성부 서강면 상수일리(上水溢里)가 되었고,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龍江面) 상수일리로 바뀌었다. 1936년에는 상수일정(上水溢町)으로 불렸고, 1943년 서대문구 소속이 되었다. 1944년 마포구로 관할이 바뀌었으며, 1946년 상수동이 되었다.

행정동인 이 동은 법정동인 상수동·하중동(賀中洞)·신정동(新井洞)·당인동(唐人洞)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중동은 물가 마을 중 가운데 있는 마을이어서 하중리라 불리다가 한자가 변한 것이고, 신정동은 새 우물이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당인동은 임진왜란 때 이 지역에 중국 군대가 주둔하였고,

중국인들을 당나라 사람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이 지역은 1957년 이전에는 공동묘지였다. 1910년 이전에는 도성 사람들의 시체 매장지였고, 일본인이 거주하면서부터 일본인 매장지로 바뀌었다. 1957년 서교 구획정리사업과 한강 택지개발조성사업에 따라

많은 택지가 들어서면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295번지 부근에는 점검청(點檢廳)이 있었다. 임진왜란 후 수상 운행을 위해 설치한 검문소인데, 삼남지방과 황해도지방에서

들어오는 공미를 점검하고 화물에 관세를 부과하였다.

강변 지역이라 많은 정자와 별장이 있었다. 97번지에는 을사5적의 한 사람인 박제순(朴濟純)의 99칸 저택이 있었고, 그 안에는 평초정(坪楚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공덕동의 아소정과 함께 유명한 건물이었으나 6·25 전쟁 때 불타 없어졌다. 교육기관으로는 홍익대학교가 있다.

 

[12]서교동

면적 0.94㎢, 인구 1만 8700명(2001)이다.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속한 동이다. 동쪽의 상수동과 하수동, 서쪽의 망원동과 성산동,

남쪽의 합정동, 북쪽의 동교동·연남동과 접한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의통방(義通坊) 세교리계(細橋里契) 지역이었다. 1911년에는 경성부 연희면(延禧面)에 속하였고,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서세교리(西細橋里)에 속하였다. 1936년 서교정(西橋町)으로 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에 편입되었다. 1944년 마포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 서교동으로 바뀌었다.

법정동과 행정동의 이름이 같다.
 
일제강점기에는 양화나루로 가는 길목에 한적한 채소밭이 있는 구릉지대였는데, 1957년 서교 택지정리사업을 시작하면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합정로변과 서교로, 양화로, 동교로 주변은 주거지역이면서도 교통량이 많은 곳으로, 1970년대 말부터 많은 예식장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예식장거리라고도 불린다. 이 동은 예식장과 더불어 종교기관, 금융기관이 유난히 많다.

아랫잔다리, 즉 서세교는 지금의 서교동사무소 일대를 말하는데, 한강으로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작은 다리라는 뜻에서 붙여졌다. 작은 다리가 잔다리이며, 이를 한자로 고친 것이 세교(細橋)이다. 동서 두 군데 있던 것 중 서쪽의 잔다리에서 동 이름이 유래하였다.

아랫잔다리 안쪽 마을을 안말이라 하였으며, 밤나무가 많은 지역을 밤동산이라고 하였다. 밤동산이 시루처럼 생겼으므로 시루기봉·시리미 또는 증산(甑山)이라고도 하였다. 증산마을에는 부군당 혹은 도당이라고 부르는, 마을 수호신을 제사지내는 곳이 있었는데, 이 도당에서 사용하던 우물이 도당물 또는 도당우물이다.

 

[13]동교동

면적 0.69㎢, 인구 1만 3613명(2001)이다.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속한 동이다. 동쪽은 도화동, 서쪽은 토정동, 북쪽은 도화동·용강동, 남쪽은 한강 건너 여의도와 마주하고 있다. 동쪽 잔다리를 한자로 줄여 만든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의통방(義通坊) 세교리계(細橋里契) 지역이었다. 1911년 경성부 연희면에 속하였고,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동세교리(東細橋里)라고 하였다. 1936년 동교정(東橋町)으로 바뀌었고,

1943년 서대문구에 편입되었다. 1944년 마포구 관할이 되었으며,

1946년 동교동으로 바뀌었다.

법정동과 행정동의 이름이 같다.
 
연희궁과 가까운 곳에 있어 궁동이라고도 하였으며 서교동 지역보다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양화진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에 자리잡은 점은 서교동과 같다.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던 이 지역은 1957년 서교택지정리사업이 시작되면서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중산층이 많이 거주하며, 마포구의 다른 지역보다 주민 이동이 적은 편이다. 양화대로, 와우산길, 서교동길 등이 지나고 도로변에는 신촌상가, 농협공판장 등 상가가 형성되어 있으며, 도로 뒤쪽으로는 주택지구가 형성되어 있다.

동쪽 잔다리 또는 윗잔다리는 한강으로 가기 위해 건너야 했던 작은 다리가 있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작은 다리가 잔다리로, 이를 한자로 고친 것이 세교(細橋)인데, 이 동은 동서 두 군데 있던 것 중 동쪽의 잔다리에서 유래하였다. 신촌전화국 부근에는 강성샘이라는 웅덩이가 있었다. 아기의 태를 이곳에 버리면 무병 장수한다는 소문으로 많은 사람들이 태를 버린 곳인데, 한강과 통했었다고 한다.

 

[14]합정동

면적 1.71㎢, 인구 2만 3408명(2001)이다.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속한 동이다. 동쪽의 당인동·하수동, 서쪽의 원동, 북쪽의 서교동, 남쪽의 한강과 접한다. 마을에 조개우물[蛤井]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연희방 합정리계(合井里契) 지역이었다. 1911년 경성부 연희면에 속하였고,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합정리(合井里)로 바뀌었다. 1936년 합정정(合井町)으로 바뀌어 1943년 서대문구에 편입되었다. 1944년 마포구로 관할이 이전된 뒤, 1946년 합정동으로 바뀌었다.

법정동과 행정동의 이름이 같다.
 
동 이름이 유래한 조개우물은, 우물 바닥에 조개껍질이 많아 붙은 이름으로 지금의 절두산순교기념관 근방인데, 처형장이던 이곳에서 망나니들이 사형 도구로 쓰는 칼을 갈고 물을 뿜기 위해서 팠던 우물이다. 천주교인 탄압 무렵에도 물고문용으로 사용되었는데, 강변도로가 생기면서 없어졌다.

서울외인묘지와 양화대교 진입 인터체인지, 한강시민공원, 절두산순교기념관 등이 동의 중요 부분을 차지한다. 외인묘지는 양화진 진대(鎭臺)의 뒷동산에 해당하는데, 1885년 임금으로부터 땅을 하사받아 다음 해부터 묘를 쓰기 시작해 현재 약 500기의 묘가 있다. 절두산순교기념관은 국내 천주교 신자들뿐만 아니라 서울특별시에서 선정한 외국인을 위한 시내 주요 관광 코스에 포함되어 있다.

양화대교가 놓인 곳은 조선시대 서울을 출입하던 나루터로, 1754년 어영청 소속으로 양화진이 설치되었다. 양화나루 근방은 경치가 뛰어나다. 절두산성지가 있는 곳은 지형이 누에 머리 모양을 하고 있어서 잠두봉(蠶頭峰)이라 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면서 절두산(切頭山)으로 바뀌었다.

 

[15]망원동

면적 1.81㎢, 인구 4만 5841명(2001)이다.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속한 동이다. 동쪽은 서교동·합정동, 서쪽과 북쪽은 성산동, 남쪽은 한강과 접해 있다. 마을에 망원정(望遠亭)이 있었던 데서 동 이름이 유래한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연희방 망원1계(望遠一契)·망원2계·망원3계 지역이었다. 1911년 경성부 연희면에 속하였고,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망원리(望遠里)에 속하였다. 1936년 망원정(望遠町)으로 되었고,

1943년 서대문구에 편입되었다.

1944년 마포구로 관할이 바뀌었으며, 1946년 망원동으로 되었다.

법정동인 이 동은 행정동인 망원1·2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변 쪽으로 한강시민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망원빗물펌프장이 홍수를 조절하고 있다. 망원로가 동의 중심을 지나며, 합정로, 성산로, 동교로가 외곽으로 지난다. 강변로와 동교로 사이에는 공장지구가 형성되어 있고

그 외의 지역은 대부분 주택지구이다.

망원정은 조선 태종의 아들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별장인데, 1424년에 건립되었다. 처음에는 희우정(憙雨亭)이라고 하였다가, 1484년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소유로 바뀌자 정자를 보수하면서 '먼 경치도 잘 볼 수 있다'는 뜻의 망원정으로 하였다. 1506년 연산군 때 망원정의 확장 공사를 하면서 수려정(秀麗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공사가 중단되면서 원래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명나라 사신 접대 장소로 많이 사용되었다. 양화나루 서쪽에 있었는데, 1925년 홍수로 유실되었던 것을 1991년에 복원하였다.

473, 476번지의 방울내지역은 한강에서 올라온 가물치·잉어·메기 등과 참새가 많아 밤 새워 잡았다고 하나 동의 대부분 지역이 1960년 이후 택지 개발로 인해 구획정리가 되면서 공동주택 지역으로 바뀌었다.


[16]연남동

면적 0.65㎢, 인구 1만 8904명(2001)이다.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속한 동이다. 동쪽의 동교동·창전동, 서쪽의 성산동, 남쪽의 서교동, 북쪽의 서대문구 연희동과 접한다. 연희동에서 분리되어 간 새 동이 연희동 남쪽에 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조선 말기에는 한성부 북부 연희방 지역이었다. 1911년 경성부 연희면에 속하였고, 1914년에는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연희리(延禧里)였다. 1936년 연희정(延禧町)으로 바뀌었고, 1943년 서대문구에 편입된 후 1946년 연희동이 되었다. 1973년 서대문구 성산동과 연희동 일부가 마포구에 편입되었고, 1975년 연희동 일부를 분리하여 연남동이라고 하였으므로 마포지역에서는 동의 역사가 가장 짧다.

법정동과 행정동의 이름이 같다.
 
동을 이루는 지역은, 처음에는 연희동 지역 중 남서쪽 경계로부터 경의선까지와 서대문구 수색동에 이르는 서부지역이었는데, 성산대로 개통으로 연희동 남측이 이 동으로 편입되었고, 1977년에는 동교동 일부도 포함되었다. 1970년대부터 정비된 지역이 많아 고급 주택이 많다. 도시계획이 잘 되어 있고, 주택과 주택 사이의 도로도 넓어 서울 시내에서도 대표적인 주거지역이다.

경성중고교, 경성여고, 경성유치원으로 구성된 경성학원이 있고, 500여 미터의 가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연희로와 평행하는 복개천을 따라 경의선 철로 아래를 통과하는 가로변은 순대국집으로 유명하다.

 

[17]성산동

면적 2.89㎢, 인구 5만 9892명(2001)이다.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속한 동이다. 동쪽의 서교동과 연남동, 서쪽의 상암동, 남쪽의 망원동,

북쪽의 서대문구 남가좌동과 접한다.

이 마을 부근의 산이 성(城)처럼 둘러 있으므로 우리말로 성메, 성미라고 부르던 것을 한자음으로 성산이라 하였다. 겸재(謙齋) 정선이 양천대감으로 있을 때 이 산을 소재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렸다.

조선시대 말에는 한성부 성밖 지역이었다. 1911년에는 경성부 연희면에 속하였고,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성산리(城山里)로 바뀌었다. 1949년 서대문구에 편입되었고, 1975년 마포구에 속하게 되었다.

법정동인 이 동은 행정동인 성산1·2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산2동사무소에서는 중동(中洞)의 행정도 맡고 있다.
 
논밭이었던 동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홍제천의 직강(直江) 공사를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굽어 있던 홍제천을 바르게 하면서 주변의 경지정리가 시작되었고, 이것이 8·15 광복 후 성산지구 택지조성으로

이어짐에 따라 현재의 지형이 되었다.

성산2동은 대부분 주택지역이며, 불광천 둔치에는 서부자동차검사소가 있다.
불광천 서쪽은 난지도 지역을 중심으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성산2동사무소 일대를 무리울 또는 무이동(武夷洞)이라 하였는데, 무리지어 다니지 않으면 다니기가 무서워 항상 떼지어 지나는 곳이라는 뜻이다.

자연마을인 풀무골은 야동(冶洞)이라고도 하는데, 불광천 건너 상암동으로 가는 길목이다. 효종 때 김자점(金自点)이 역모를 꾀하여 군사동원자금으로 위조 엽전을 만들었는데, 엽전을 녹이기 위한 풀뭇간을 이곳에 만들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1950년대 초까지도 이 일대는 논밭이었으므로

녹슨 옛날 엽전이 많이 발견되었다.

 


[18]상암동

면적 8.38㎢, 인구 7,433명(2001)이다.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속한 동이다. 동쪽은 성산동·망원동·중동, 서쪽은 경기도 고양시, 북쪽은 은평구 수색동, 남쪽은 한강과 접한다. 자연부락인 수상리(水上里)의 '상' 자와

휴암리(休岩里)의 '암' 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북부 수암리계(水岩里契)·수생리계(水生里契) 지역이었다. 1911년 경성부 연희면(延禧面)에 속하였고,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상암리(上岩里)로 바뀌었다. 1949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고, 1950년 상암동으로 바뀌었으며, 1975년 서대문구에서 마포구로 관할이 바뀌었다.

법정동과 행정동의 이름이 같다.
 
마포구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가지고 있는 동이며, 난지도가 동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구세군 후생학교가 있고, 2002년 월드컵 주경기장과 보조경기장이 있다.

수상리는 물치, 물위치, 수색(水色), 수생리라고 하였는데, 수색동 앞 넓은 들 건너 마을을 뜻하며, 장마 때면 한강물이 이곳까지 넘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한다. 부엉바위골은 이 마을 근처에 부엉이 모양의 바위가 있어 휴암동이라고 하였다.

압도(鴨島)·중초도(中草島)는 난지도(蘭芝島)라고 한다. 1977년 이곳을 서울특별시 쓰레기 처리장으로 만들기 전에는 갈대숲이 우거져 휴식 공간이나 영화 촬영 장소로 많이 이용되었고, 한강 하류 삼각지로서 많은 동식물이 서식하였다. 구석말은 귀리(歸里)의 구석에 있고,

모로 돌아 한강변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귀이깨라고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