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그리움♤

봄에는 저승문을 활짝 열어둬라 - 김종건

행福이 2009. 12. 17. 11:35

봄에는 저승문을 활짝 열어둬라 -김종건

봄에는 저승문을 활짝 열어둬라
겨우내 죽음에 저항하던 영혼들
목련꽃 쓰러지듯
연속적인 부음(訃音)을 전해온다.

살얼음처럼
이어지던 질긴 목숨의 저울질을
환생의 봄, 더는 견디지 못해
인연의 끝을 놓는가

동지에 숨을 접으면
남아있는 이들이 힘들까
이 눈물 나게 찬란한
봄까지 버티고 버티셨나

아침엔
저승문을 활짝 열어둬라

외로운 동면의 밤
죽은 자 없어 심심했던
사자(使者)들
봄눈 녹는 시내를
건너 한걸음에 달려오네

어이 갈까 어이 갈까
저 멀고 먼 구천 길
이 수많은 그리움을
남기고 어이 갈까

시체보다 더
하얀 목련을 보고 팠던 사람들
뚝뚝 미련의
꽃잎을 흘리며
스스로 관으로 들어간다

두려워 마라
황천이 멀다 하나
바로 앞 대문 밖인 걸
삶과 죽음은 한낱 신기루,
손 안의 바람
마지막으로 차려입는
수의엔
회한을 감출
주머니 하나 없음을 울지 마라
나 죽은 이후에 울지들 마라
찬란한 유산이나
유서를 남기지 못한다 한들
섣달 열흘 동안
읊어줄 피맺힌
비망록이 없다 한들
이 땅 위에
살았던 흔적 하나 없으리

누가 날 위해 통곡할 것이며
누가 날 위해 무덤에 같이 묻힐 것이며
누가 날 위해 다시 살아줄 것인가를
걱정하진 말자

저 건너 산등성엔 잔설이 보이고
아직은 날이 덜 풀려 긴장한 땅
그래도 즈믄즈믄 밟아대며
흙 속으로 돌아가자

우리 죽는 것은
내 몸을 주어 새 생명을 살아내기 위함이니
그 문으로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영혼들이
세상으로 나올 수 있도록
봄에는 저승문을 활짝 열어둬라

어차피
산다는 건 점점 잊히는 것
오늘은 미련을 버리자
저승사자, 문 앞에서
죽음의 초청장을 배달할 때
왜 이제 오냐며
맨발로 뛰쳐나가 반기지 않더라도
질질 짜며 더 살게 해달라고
매달리진 말자

새벽이 오기 전에
여름이 오기 전에
슬픔이 오기 전에

당당히 죽어주자

엄니의 자궁 속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안 순간부터
우리는 죽음을 준비했기에
나를 기억하는 모든 인연의
씨앗들을
비수로서 철저히 잘라내자

그리고 소리치자
시체보다 더 하얀
목련꽃 뚝뚝 떨어지는 날에는
저승문을 활짝 열어 놓으라고

정말 우리의
인연이 여기 까지라면

당신에게 부탁이 있어요.
밥 거르지 말고 제때 꼬박꼬박 챙겨 먹어요.
날씨 쌀쌀한데
옷 따뜻하게 입고 다니고요.
아프면 병원부터 꼭 가봐요.
속상하다고 혼자 울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