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내고장△

당인동(唐人洞)과 상수동(上水洞) 유래

행福이 2010. 11. 22. 19:31

 

당인동(唐人洞)  

 

당인동의 명칭은

이 지역이 조선시대부터 당인리라는 이름으로 불려온 데서

비롯되는데, 당인동은 원래‘댕말’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댕말이란 댕기마을 혹은 당인마을의 뜻인데,

당은 중국의 당(唐)을 뜻하는 것으로 중국사람이 거주하던 마을이라는 뜻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병사 한 사람이 조선의 처녀에게 반해

전쟁이 끝났다는데도 불구하고 돌아가지 않고 내내 그 처녀 곁에 머물면서

 청혼을 했으나 처녀는 외국인 따위는 안중에 없다는 뜻으로 얼마 후

경상도 땅에서 올라온 재력은 있으나 여러 차례 과거에 떨어진

과거 낙방생의 후실이 되어 그 사람을 따라서 경상도로 갔다.
그러나 본처의 구박이 심한데다가 3년이 지난 후

남편마저 죽게 되자 하는 수 없이 친정인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처녀를 잊지 못하고 기다리던 명나라 병사는

과부가 된 그녀에게 구혼을 하였는데,

세상 풍파를 모두 겪은 그녀는 마침내 승낙하여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명나라 병사는 힘도 세고 부지런해서

일도 잘 할 뿐만 아니라 물감먹이는 일에도 뛰어났다.
주로 댕기에 물감을 먹이고 금색으로 글씨를 쓰는 일을 많이 하였는데,

이 일로 많은 재산을 모으게 되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다섯 형제까지 둔 명나라 병사는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었는데,

나이가 들자 중국 땅을 바라보며 죽기 전에 부모님을 한번 보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다.
다섯 아이의 어머니가 된 그녀는 그 일만큼은 거절할 수가 없어 남편을 중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중국으로 건너간 남편은 2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다시 3년이 지나자 한 중국인이 와서

그 병사가 3년 전에 유행한 장티푸스로 목숨을 잃었다며

조그마한 금덩이 두 개를 병사의 유물이라며 전해주었다.
다섯 아이는 자라면서 모두 명나라 병사와 같은 골격을 유지했으므로

사람들은 이 때부터 이 마을을 댕말이라 부르게 되었다.


*유명지  -  [당인동 부군당]

 

당인동 부군당은 처음으로 관리에 부임하는 사람들이

먼저 들러 제사를 지내고 자신의 관로가 오래 가도록 기원했던 곳이다

 

 

상수동(上水洞)

 

상수동의 명칭은

조선시대에 이곳이 상수일리(上水溢里)로 불렸던 것에서 유래한다.
상수동은‘강가 위쪽 마을’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명칭이며,

하수동은 그 아래쪽 마을이라는 뜻이었다.


와우산 서쪽 산록에 자리잡은 상수동은

1957년에 서교구획정리사업이 계획 시행되기 전만 해도 공동묘지였다.
1910년 이전에는 도성민의 시체처리 장소였으나

일본인이 대거 거류하기 시작하면서

이 지역은 일본인 매장지로 바뀌게 되었다.

상수동 295-1번지 부근에는 점검청(點檢廳)이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수상 운행을 위한 검문소인데, 삼남지방과 황해도지방에서

들어오는 공미를 점검하던 관청으로 후에 화물에 관세를 부과하였다.

당우물 혹은 활터께 우물이라 부르는 곳이 상수동 328-9번지에 있었다.
한때 마포구 관내의 민방위 비상용 공동우물로 사용되었는데

집집마다 가정용 수도가 건설되지 않았을 때만 해도 이 우물의 효용도는 매우 높았다.
청일전쟁때 청나라군이 사용했다는 이 우물은 임오군란 직후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의 1개 중대가 양화진에 대기하고 있을 때

성외에 배치시켰던 청국군의 오장경(吳長慶) 주력부대가 사용했다는 설도 있는데,

이로 보면 청나라군대에서 사용하였던 우물임을 알 수 있다.
이 우물은 창전동의 신당우물, 상수동 93-20번지의 왜우물과 함께

서강 3대우물이라 할 만큼 유명하였고 많은 수량과 함께 물맛도 있었다.
일본군이 주둔하면서부터 왜우물이라 했는데, 일명 쌍우물이라고도 불렀다.
그 까닭은 우물 속에서 나오는 수맥이 두 개여서 사실 2개의 우물을 만들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1개를 만들었기 때문이며,

1개의 우물로 2개의 효과를 낸다는 뜻으로 쌍우물이라 하였다.
반대로, 이 때문에 외우물이라고도 부른다.

상수동은 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에 많은 정자와 별장 등이 있었다.
상수동사무소가 위치한 상수동 97번지에는 을사5적의 한 사람인

박제순의 99칸 저택이 있었고, 그 안에는 평초정(坪楚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을사늑약에 찬성하여 주권을 일본에게 넘겨준 박제순의 이 저택은

공덕동의 아소정과 함께 유명한 건물이었으나 6.25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었다.
간동에 본가를 둔 박제순이 경치좋은 한강가에 별장을 짓고

별장의 이름을 지으려고 고심하고 있던 중

이토(伊藤博文)를 이곳 별장에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고 난 후 환담을 나누다가

문득 그에게 별장 이름을 지어줄 것을 요청하자

이토는‘백성을 평정한다’는 뜻으로 평초(平草)라고 하였다.
그러자 옆에 같이 참석했던 이근택과 이완용도 좋은 뜻이라며

그렇게 불렀으나, 후일 박제순 자신이 평초(坪楚)로 바꾸었다고 한다.

 평초정은 6.25전쟁으로 소실되었으며,

1960년대 이후 정비되어 주택으로 바뀌었다.

 

 

*유명지 -  [점검청]

상수동295-1번지 부근에 있던 수상 운행을 위한 검문소로 삼남지방과

황해도 지방에서 들어오는 공미를 점검하던 관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