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내고장△

한강위의 섬 이야기-밤섬

행福이 2014. 1. 29. 13:40

한강위의 섬 이야기-밤섬

 한강은 남한강과 북한강의 둘로 나뉘며 남한강을 본류로 한다.
양수리에서 합쳐지는 한강은  
파주시에 임진강과 만난 다음 서해로 간다.
한강은 삼국시대 초기까지 대수라 불렸고,
광개토대왕비에는 아리수로 기록됐다.
백제가 중국 문화를 수입하면서부터 중국식 명칭인 한수가 되었다.
하천이 속도가 느려지거나 유로가 바뀌면 퇴적물이 하천에 쌓인다.
이로 인해 한강의 미사·난지도와 같은 하천 한가운데 섬 즉 하중도가 생긴다.
한강 위의 섬은 '여의도, 선유도, 밤섬, 노들섬, 서래섬'이다. 
뚝섬은 섬이 아니다.
조선시대 왕들이 지금 뚝섬 방향인 왕십리 쪽으로 사냥을 나갔다.
이때 호위하는 군사가 독(纛)이라는 큰 깃발을 이곳에 세웠다.
독기가 세워진 곳을 보고 왕이 거기는 한강으로 들어가는 중랑천 하류가 있어
삼면이 물이 있으니 섬이라고 부를 만 하구나. 하여
한자로 독도, 한글로 뚝섬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독이라는 깃발을 한글로 뚝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밤섬

밤섬이 장마  때 닷새 동안 물에 잠겼다.
큰 나무들만 남고 섬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쓰레기와 죽은 나뭇가지들이 동식물을 위협하고 있다.
8월 28일부터 5일 동안 특전사 장병들과 영등포 마포지역 시민단체 회원 등
5백여 명이 7만 3천여평 섬 전체를 청소했다.
다년생 식물까지 회복되는데는 2년정도가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서강대교와 여의도 사이에는 밤섬이 있다. 옛날에는 율도라고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여의도와 함께 고양군 용강면 여율리가 됐다.
지금은 서울 마포구 서강동 15통이다.
섬이 밤알같이 생겼으며 맑은 모래로 유명해 
마포팔경에  '율도명사(栗島明沙)'로 소개된다.
대동지지에 의하면 섬 전체가 수십리의 모래로 둘러싸여 있었다.
물이 적어지면 여의도에와 이어졌다.
기반암은 단단한 바위층이고, 섬의 동부와 서부의 하식애(河蝕崖)는
'작은 해금강'이라 불릴 정도로 경관이 아름다웠다.
68년 폭파에 의하여 밤섬의 대부분은 없어지고
일부 10여개의 조그마만 섬의 형태로 자연초지상태였다.
30여 년 동안 한강 퇴적물에 의하여 섬의 면적이 매년 증가하고 있다.

 

 홍수 때에는 대부분 범람한다. 해발고도는 3.0~5.5m이며,
나무와 풀이 우거지고 새들이 모이면서
도심 속의 철새도래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88년부터 철새도래지로 관리하고 있으며
1999년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됐다.
밤섬에 공동사회체제 속에서 살아온 이 섬에
마씨(氏), 인씨, 석씨, 선씨 등 희성(希性)이 많았다.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고려때는 귀양보내던 섬이었으며
선착장으로 백사장을 건너 인천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500년전 조선의 서울 천도와 함께 배 만드는 기술자들이 처음 정착했다.
주민들은 부유하고 매우 번창한 편이었다.
가구가 많고 농업생산은 별로 없으나, 
한강 수운에 관련된 조선업, 뱃사공, 배에
물산을 실어 내리는 하역에 의존하였다.
또한 용재총화에 의하면 조선초기부터 뽕나무 농사가 성행했다.
암석으로 이루어진 큰 밤섬 아래 백사장은 좋은 조선장(造船場)이 되어서,
여러 백년 동안 조선업이 가장 중요한 직업이 되었다.
배만드는 기술자인 목수가 가장 큰배를 많이 제작하던
시기에는 54호(戶)였고, 일제시대에는
강제징용수첩을 받은 청년층 조선목수가 17명이었다고 한다.

조선업은 타지방의 주문을 받는 것과, 공임(工賃)을 받고
타지방에 고용되어 가는 경우가 있는데,
조선업이 번영하던 시절에는 경기가 좋았었다.
그러나 625의 피해를 겪은 이후 조선업은
완전히 쇠퇴하여 다른 직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1967 년까지 62세대가 살면서 고기잡이와 조선,
뽕나무 약초(감초) 재배나 염소 방목 등을 했다.
밤섬은 여의도가 개발되면서 한강하구의 확장으로 유수를 좋게하고,
여의도 제방의 축석에 필요한 잡석채취를 위해 1968년 2월 폭파 해체된다.
폭파 당시 밤섬에는 부군신, 삼불제석님, 군웅님의 3신을 모시는 사당을 만들어
17대를 살아온 62가구 443명이 살고 있었다.
1968년 2월  한강의 흐름을 좋게 하고 여의도제방을 쌓는 데
필요한 잡석 채취를 위해 섬을 폭파해 해체했다.
주민들은 밤섬이 내다 보이는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기슭으로 이주했다.
지금도 와우산에서 10여 가구가 모여살고 있다.
이주할 때 새로 지은 창전동부군당이 있어서
지금도 와우산 기슭의 임대아파트 단지에서 매년 음력 1월2일 동제를 지낸다.
전통적인 마포나루굿은 625전쟁중에 사라졌다.
마포나루굿은 91년 6월부터 주민들에 의해 재현, 해마다 실시하고 있다.
지금의 창전동부군당제는 옛날 마포나루굿의 자취를 읽을 수 있다.
2004년 12월17일 '밤섬 부군당굿'은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5호로 등록됐다.
한편 합정동과 밤섬 사이에 잉화도라는 작은 섬이 있었다. 
전생서와 사축서의 관원들이 섬에 집을 짓고 살면서
나라에 제공할 돼지와 양을 기르고 있었다.
명종 실록에 따르면 고립된 이섬에서 근친혼이 성행했다.
이에 따라 명종 11년 신하들은 섬에 있는 집을
모두 철거해 딴 곳으로 이주시키고 가축을 기르는 일은
남자만이 하도록 해 여자의 섬 출입을 금지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