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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 Amedo Modigiani(1884~1920) 고독한 혼의 소리와 관능미(官能美)

행福이 2016. 10. 4. 12:19


모딜리아니 Amedo Modigiani(1884~1920)

고독한 혼의 소리와 관능미(官能美)

 


 잔느는 헌신적이며 가장 순정적인 여자였다.

착하고 순정적인 잔느는 술과 마약에 시달리는 모디와는 달리 절제된 생활을 했다.
남편이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라로통드로 찾아가 만취한 남편을 찾아오곤 했다.
잔느와 함께 동거하면서도 모디가 다른 여자로부터 애까지 낳았지만
그녀의 헌신적인 사랑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잔느는 1918년 11월 29일에 후에 커서
[모딜리아니라는 남자의 신화]란 전기를 쓴 딸 지오바니를 낳았는데,
시청에 출생신고를 하거 가던 모디는 너무 행복한 나머지
한 잔 한다는 것이 그만 정신을 잃을 정도로 취해버려
그 날 결국 딸을 호적에 올리지 못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의 건강은 악화일로를 내닫고 있었다.
값싼 음식으로 끼니를 때워 영양상태는 엉망인데다가
술, 담배와 무절제한 생활은 그를 더욱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의 방탕함을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도록 재촉했다.
모디에게 죽음이 임박했을 때 잔느는 속수무책인 채
넋나간 사람마냥 그를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의사를 부를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던 것이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방안에서 환자는 피를 토하며 끊임없이 기침을 해댔고,
이젤엔 오일이 채 마르지 않은 바르고니의 초상이 미완성인 채 남겨져 있었다.

모디는 의식이 몽롱한 채, "나는 딸이 크는 것조자 보지 못하고 죽는다.
사랑하는, 내 사랑하는 이태리여!
내가 죽으면 잔느는 친구 수탄하고 살어"라고 중얼거렸다.
이것이 생전의 모디가 마지막 남긴 말이었다.

1920년 1월 24일 저녁 8시 50분에
그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비극적인 삶을 마감하고 만 것이다.
다음날 아침, 죽은 남편의 시체를 보러 병원에 간 잔느는
오랫동안 말없이 물끄러미 시체를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없이 뒷걸음쳐 영안실을 나왔다.

겁이 난 그녀의 부모는
실신상태에 있는 잔느를 집에 데려다 오층 식모방에 가두어 놓고는
남동생 앙드레로 하여금 밤새 누나 곁은 떠나지 않고 지키도록 했다.

그러나 이미 잔느에게는 자살할 각오가 서 있었다.
결단은 되어 있었지만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눈다는 것이 두려운 그녀는
동생이 잠깐 조는 큼을 타 오층 창밖으로 임신 9개월의 몸을 내던졌다.

허공에서 날린 그녀의 몸은 무참하게 떨어져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잔느는 순결과 희생, 그리고 생명까지 던져
모디를 사랑한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여인이었다.

모디의 장례식은 비참한 그의 생애에 비해 무척이나 화려했다.
온통 꽃에 파묻힌 그의 관이 실린 영구차의 뒤에는
 파리의 유명한 모든 화가들이 뒤를 따랐다.

피카소, 데리앵, 우틸로, 작크 립시츠, 키슬링, 올티즈, 자라데, 부랑빙 ...
수도 헤아릴 수 없는 화가들이 페르 라쉐즈 묘지로 가는 슬픈 행렬을 이룬 것이다.